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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나쁜 짓 할래요?

신이 내린 저주
“저기요."
여자가 내 팔을 잡으면 100% '얼굴에 기운이 안 좋으시네요' 이다.
“잠깐만 멈춰봐요.”
얼굴에 짜증을 잔뜩 담고 돌아보며 '바쁩니다.'라고 말을 해야 한 번에 떨어져 나간다. 하지만 항상 호기심이라는 게 말썽을 부린다. 여자의 목소리가 상당히 예뻤다.
광채.
이 여자 얼굴에서 광채가 보였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광채가 났다. 내 심장은 ‘두근’ 이라는 말도 부족할 만큼 꽉 쪼그라들었다. ‘두구구구구궁’이라던가 ‘퍼버버버버벙’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난 저 눈부신 광채 때문에 말을 못 꺼내고 있었지만, 이 여자는 뭘까? 내 팔을 잡아놓고선 내 얼굴만 멍하니 보고 있다.
“맞나? 아닌가? 잘 모르겠는데…”
“네? 무슨…”
이 분의 외모가 내가 요즘 푹 빠져있는 캐서린 맥피와 닮지 않았어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만 가보겠습니다.’라고 했을 거다. 입에는 살짝 미소를 담고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깜빡하는 사람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면 되겠다.”
여자가 환하게 웃었다.
너무 환하게 웃으면 심장이 아파요. 그렇게 환하게 웃지 말아 주세요.
“저랑 저녁 먹을래요?”
뭐지? 이거 일반인 대상의 몰래카메라인가? 연예인 지망생을 이용해서 일반인의 반응을 보는? 주변을 쭉 둘러보았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다. 건물 위를 보았지만 카메라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고 몰래카메라용 안경 같은 것도 쓰고 있지 않다.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지. 한 번 떠보자.
“저녁이요? 제가 약속이…”
“거짓말~ 거짓말~~. 이거 몰래카메라 같은 거 아니고 방송 촬영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저녁 같이 먹어줘요.”
꽤 쌀쌀한 날씨인데도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제가 그 생각 하는 걸 어떻게...”
“얼굴에 다 티 나잖아요. 주위 두리번거리고. 이마에 주름도 갑자기 잡히고. 다 티 나요.”
그렇다고해도 몰래카메라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맞춰버리는 건 너무 수상하잖아. 엄청나게 이상하고 의심스럽다. 이걸 어쩐다.
“제가 살 테니까 같이 먹어요. 대신!!!”
여자는 내 눈앞에 검지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너무 비싼 건 안 돼요.”
TV안에서나 허리에 손 올리고 손가락 까딱까딱하는게 귀엽지 현실에서 보면 온 몸이 오그라들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TV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하느냐의 문제였다. 저게 저렇게 자연스럽다니.
그래.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온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아마 3년은 여자를 못 만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 근처에 무제한 삼겹살 파는 곳 있는데......”
“삼겹살 좋아요~ 고기 먹고 싶은 건 어떻게 알았데.”
메뉴 하나 골랐을 뿐인데 이렇게 나 스스로에게 잘했다는 생각이 들다니. 그래. 어짜피 헛걸음 한거 저녁이라도 즐겁게 먹자.
12시가 되면은
삼겹살을 야무지게 구워내는 모양을 봐선 곱게 얌전떨면서 자란 것으로 보이지도 않고 삼겹살 쌈을 마늘까지 넣어 알뜰하게 싸 먹는 걸 보면 내숭 떠는 성격도 아닌 듯 보이는 이 정체불명의 여자는 도대체 뭘까?
“저기…”
이 여자가 삼겹살 들어 올리는 속도가 조금 잦아들면 말을 걸까 했지만 쉬지도 않고 꾸준한 속도로 계속 쌈을 싸는 걸 보니 아마도 배가 다 차기 전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기세이다.
“네? 뭐요?”
정말 무서운 표정이다. 앙다문 저 가느다란 입술 라인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감히 내가 쌈 싸는 걸 방해해? 라는 자세로 딱 멈췄다.
“이름이 뭐예요?”
여자는 들고 있던 상추의 허리를 뚝 분질러 반으로 접었다.
“여리요. 한여리.”
“이름 예쁘네요.”
여리씨는 손에 들고 있던 쌈을 입에 욱여넣고는 나를 턱으로 까닥 가리켰다. 뭘 의미하는지 몰라 멀뚱멀뚱 바라보았더니 또 턱으로 두 번 까딱까딱한다. 또 멍한 표정으로 있었더니 바로 화를 낸다.
“그쪽 이름은 뭐냐고요.”
“아! 저요. 저요? 박 결이요.”
내 이름을 듣고는 머릿속에 또 뭐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갸웃갸웃한다. 아! 귀엽다고. 그러지 말라고.
이 귀여운 내 스타일의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먼저 저녁을 먹자고 제안을 했으면, 그 사이에 뭔가 이야기를 하던가 날 혹하게 할 만한 행동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말도 없이 그냥 저렇게 먹고만 있는 저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는 거지?
“아무 생각 안 해요. 지금은 배고파서 그냥 먹고 있을 뿐이라고요.”
“어라! 어라!! 어라!!!”
이 여자 분명 내가 생각한 것을 정확하게 대답했다.
“그것 봐. 내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잖아요.”
여리씨는 불판에서 익어가는 고기를 거칠게 팍! 뒤집고는 또 날 빤히 쳐다본다.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내 얼굴 앞으로 고기 굽는 집게를 훅 내민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건 아니에요. 그냥...”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뭘 할지 아는 것이에요.”
뭘 할지 알고 있다니 이게 뭔 무책임한 대답인가. 조명에 반짝반짝 빛나며 비단처럼 흘러내리는 저 긴 머리카락이 너무나 매력적이고, 조물거리는 입술도 사랑스럽고 부릅뜨고 삼겹살에서 떼지 못하고 있는 저 눈에도 빠져들 것 같지만 저 무책임한 대답은 조금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 뭘 할지 어떻…”
“좀!!! 먹자구요. 배 채우고 난 다음에 이야기해도 되잖아요. 어짜피 시간 많은데.”
시간이 많이 뭘 많아. 난 내일 출근을 해야 하고 12시에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단 말이다.
들켰다.
여리씨는 무제한 삼겹살집이 오늘 납품받은 고기의 절반 정도를 끝장을 낸 뒤에야 먹는 것을 멈췄다. 두 시간을 먹으면서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고기를 자기 몸무게만큼 먹은 이 분은 갑자기 기름진 냄새만 나도 구역질이 난다면서 가게를 탈출하듯 일어났고 우리는 근처 커피전문점으로 들어갔다.
“나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 따뜻한 아메리카노 하나요.”
그리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렇게 먹어대니 속이 편할 리가 있나.
여리씨가 자리로 돌아온 것은 주문했던 커피가 나오고 한참 시간이 지나서였다.
“커피가 좀 빨리 나와서 식었는데 괜찮아요? 새로 주문할까요?”
“괜찮아요. 식은 커피 좋아해요.”
테이블에 놓여있는 커피의 뚜껑을 열지 않고 마신다. 커피 뚜껑을 열지 않고 먹는 건 커피가 식었다는 것도 있겠지만 위생에는 그리 크게 신경을 안 쓰기 때문일 것이다.
첫 모금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꼭 잡아들고 홀짝 마신 뒤에 두 번째 모금은 크게 한 모금 들이마신다.
“커피 마시는 거 처음 봐요? 사람 관찰하기 좋아하는 거 티 내는 거 아니에요. 관찰당하는 쪽도 생각을 해 달라고요.”
“아.. 아뇨. 그냥 커피 마시는 게 귀여워서….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니에요. 아니에요.”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적잖게 당황해서 커피를 급하게 넘기다가 목에 살짝 걸려버렸다. 나오는 기침을 참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더 크게 사래가 걸렸다. 눈물이 날 만큼 아파서 한참을 콜록거린 뒤에야 조금 진정이 되었다.
“쳇. 견디지도 못할 맨탈이면서”
여리씨는 내게 냅킨을 건넨다.
처음 저 여자와 만난 뒤부터 지금까지 내게 주도권이 넘어오지 않는다. 받아든 냅킨으로 입 주위를 닦았다.
“내가 왜 박결씨를 잡았는지 궁금하죠.”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이 여자는 치고 들어온다.
“헌팅은 처음이니까요. 게다가 내가 당하는 쪽이었다는 것을 누가 믿겠어요.”
“헌팅이라. 헌팅이긴 하네.”
묘한 표정을 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아무런 표정을 하지 않고 있는 모습마저도 매력적이다. 저 공허한 눈 속에 폭 빠져들고 싶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대화가 끊어지려 한다. 안돼. 이 대화는 끊어지면 안 된다.
“그래서 왜 잡았어요?”
“찾고 있었어요.”
“응? 뭘요? 도망간 남자친구?"
푸하하핫 하고 호탕하게 웃는다. 주변에서 모두 돌아본다.
“맞아요. 도망간 남자친구.”
“남자친구랑 제가 닮은 거예요? 저랑 비슷한 외모가 취향인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요.”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남자 보는 취향 특이하다고.”
커피를 홀짝 마신다.
커피를 마실 때면 짧게 한 모금 먹고 그다음에 연결해서 쭉 마시는 것이 습관인가보다. 익숙한 것임에도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만 마음을 놓는 것은 사람을 잘 믿다 보니 생긴 버릇일 것이다.
“근데 어디 가던 중이었어요?”
“퇴근하던 중이었죠.”
“집 이쪽 방향 아니잖아요.”
“에?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절 원래 알고 있었어요?”
여자는 당황하는 모습이 전혀 없다. 태연하게 커피 뚜껑 가장자리를 만질거리는 것이 ‘설령 알았다고 해도 뭐 어쩔건데’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이 근처가 집으로 가는 방향이면 그렇게 두리번거릴 리가 없잖아요. 집도 못 찾는 바보일 리도 없고.”
이 여자도 관찰력이 좋은 건가.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아까부터 계속 뭔가 넘겨짚듯 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것들은 족족 다 맞아떨어지고 있다. 한번은 우연, 두번째는 운좋게라고 해도 세번째는 알고 있는게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때문에 내 얼굴에서 의심의 눈초리가 가시질 않아서일까? 여리씨는 뾰로퉁한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뭔가 결심했다는 듯이 내게 말을 했다.
“난 말이죠! 박결씨가 날 엄청 마음에 들어 하고 있고 나한테 반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굉장히 신사적으로 상대를 해 주고 있는 중이라고요.”
마셨던 커피를 토할뻔했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티를 많이 냈나? 이런 거 잘 못 숨기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난 나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있었나 보다.
“아니. 뭐 그... 그걸 어떻게 알아요. 예쁘다는 건 인정하지만 아직 성격도 모르고 뭐에 관심이 많은지도 모르고 내가 여리씨를 싫어하게 될 만한 거리는 잔뜩 있어요.”
‘푸훗’하고 가볍게 웃는다.
아 그렇게 가볍게 웃지 말라고.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으니까.
“그런 것 치고는 얼굴이 너무 빨개졌는데~”
그랬다. 내 얼굴에서 엄청나게 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글렀어. 글렀어. 진심으로 스위치를 눌러버리고 싶어졌다. 내 손은 이미 가방 속에 있는 스위치를 찾고 있었다.
“나가요. 술 한 잔 해요.”
내가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술 한잔하자는 건 남자가 여자에게 ‘우리 길고 긴 밤을 보내볼까요?’라고 할 때 하는 이야기로 알고 있었는데 그 말을 내가 먼저 듣다니.
이미 여리씨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지금은 따라가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 적어도 3년이다. 이걸 놓치면 3년은 후회할 거다. 근데 왜 3년이지?
정말?
술 마시는 것을 즐김에도 술집에 가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 내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아서 술집에서는 도대체 말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술 마실 일이 있으면 되도록 음악 소리가 크지 않은 바에 가서 맥주 한 두 병 정도 먹거나 사람이 거의 없는 새벽 시간 포장마차에 가서 먹는다. 다행스럽게도 여리씨는 내 취향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근처에 있는 바에 올라갔다. 일식 안주에 와인을 주로 파는 곳인데 사람들이 모두 조용하게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무척 들었다.
나와 취향이 비슷한 걸까? 아니면 나에 대해서 정말 잘 알고 있는 걸까? 이 여자와 함께 있는 1분 1초가 모두 신기하다.
“난 와인 잘 안 마셔요.”
하우스 와인도 아니고 병으로 주문해놓고선 잘 안 마신다니 이건 또 뭔 이야기래.
“와인 먹으면 빨리 취하거든요.”
머릿속으로 소설이 마구 쓰인다. ‘오늘은 집에 안 들어가고 싶어요.’의 변형 버전인가? ‘그런데도 당신을 위해서 시켰죠.’인 건가. 머리를 아무리 팽팽 돌려도 답을 찾기 어렵다.
“근데 왜 와인 먹으러 왔어요?”
나도 날려봤다. 돌직구.
하지만 여리씨는 대답은 하지 않고 ‘헤에~’하는 표정으로 빙긋 웃으며 날 빤히 바라본다. 이건 누가 봐도 ‘정말 몰라?’라는 눈초리잖아. 또 얼굴이 빨개진다.
“그냥 오늘은 먹고 싶은 날이라서.”
짧게 대답하고는 잔에 담긴 와인을 한꺼번에 쭉 마신다. 이 여자의 매력을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예측할 수 없는 즐거움? 말을 하지 않아도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바로 알아채는 기쁨? 계속 바라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 예쁜 얼굴?
“요즘 힘든 일이 많이 생겼거든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뻔한 거 있잖아요. 돈 빌려준 친구가 말도 없이 외국으로 도망쳐버렸고, 엄마는 암이라고 하고, 회사에서 잘리고, 날씨는 추워지고”
“진짜?”
누군가에게 저주의 인형으로 삼백번쯤 찔려야 생길 것 같은 안좋은 일 종합 선물세트 같은 일이 한 사람에게 모두 일어났다고?
“결씨는 일이 잘 풀리죠?”
그렇다. 난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다. 그 날 이후로 모든 일이 잘 풀려가고 있다.
“뭐 나쁘지 않죠. 요즘 많이 이 세상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에~ 뭘 배웠는데요?”
“전 생긴 거랑 비슷하게 말이죠. 인생을 살려면 짜인 대로 살아야만 된다는 법칙이 있었어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딱 정해진 시간에 학교에서 출발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학원으로 가고 그게 끝나면 정해진 시간에 집으로 돌아와야 하고 잠자는 시간도 항상 똑같았죠.”
“꼰대네~”
“맞아요. 꼰대.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었어요. 소심한 거죠. 거기서 벗어나면 그나마 지금 있는 이 수준도 유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랬다. 난 인생이란, 규칙. 자신만의 삶의 규칙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해보는 중이에요.”
“말도 안 되는 짓? 물건 훔치고 그런 거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짓이 아니라 범죄죠. 예를 들자면 지각 같은 거.”
“지각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에요.”
“거기서부터 시작한 거죠. 회사를 처음 지각했을 때 기분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려요. 그 날은 미칠 만큼 힘들었거든요. 내가 왜 그런 짓을 하려고 했을까, 지각 말고 조금 더 약한 거로 할 걸 하면서 후회도 많이 했었죠. 근데…….”
말을 참 잘 들어준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근데 아무 일도 없더라고요. 내가 지각을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조차 없었어요. 5분 정도 늦은 건 인생에서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심지어 회사 근태 시스템조차도 5분은 지각으로 체크 안 하더라고요. 그 짧은 시간 동안의 두근거림.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을 때의 안도감. 그게 정말 엄청나더라고요.
그때부터 내가 정해놓은 법칙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죠.
절대 인생에서 하지 않겠다는 다짐했던 주식투자도 해봤고, 회사를 그만두기도 하고, 적금을 깨서 유럽여행도 한 달 다녀오기도 하고, 피시방에 가서 밤새워 게임도 하고.”
“소소해. 소소해. 인생에서 벗어나는 게 뭐 그렇게 소소해요.”
“소소해도 괜찮아요. 난 그런 것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준비하고 실행하고 또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해방감이 좋은 거니까요.”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지금까지 했던 나쁜 일 중에서?”
“아무 일도 없진 않죠. 후회되는 것들도 몇 가지 있긴 해요.”
여리씨는 비어있는 잔에 와인을 또 가득 따르더니 한꺼번에 쭉 마셔버린다.
“뭔데요? 뭔데요? 후회되는 일.”
“통장에 있는 돈 몽땅 털어서 포르쉐 산 거랑. 회사 이직하면서 연봉을 너무 많이 올려서 간 건 후회스러워요.”
“뭐야~~ 그게 왜 후회스러운 일이야. 자랑질 하는 거예요?”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 앞에서 두근두근하면서 기다리다가 열어보니 사탕 몇 개 들어있는 것을 본 어린아이처럼 투덜거렸다.
“포르쉐는 잘 타고 다니지도 않는데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요.
연봉을 많이 올린 게 후회되는 건 나랑 비슷한 일을 하는 다른 친구들과 너무 차이 나게 받고 있어서 엄청 열심히 일하고 있거든요. 야근 진짜 싫어하는데 연봉만큼은 일해야 하니까 자꾸 야근하게 되더라고요.”
“안 되겠네. 안 되겠어. 이 분 이거 안 되겠어.”
이야기의 맥락상 그저 내게 타이르기 위해서 말하는 ‘안 되겠네’라는 말이었지만 혹시 그게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닐까 싶어 기분이 살짝 안 좋아졌다. 도대체 내가 이 여자한테 얼마나 많이 빠져있는 거야. 이런 지나가는 말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다니.
“그럼 저랑 오늘 나쁜 짓 하나 더 해요.”
순간 내 얼굴이 또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내가 상상한 그게 아니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나쁜 짓이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길 바라는 신호등 고장 난 사거리가 머릿속에 만들어졌다.
“푸하하하핫. 얼굴 빨개졌네. 그 나쁜 짓이 뭔지 아는구나?”
여리씨는 진짜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저 웃는 모습을 계속 볼 수 있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일어나요. 가자~ 가자~ 나쁜 짓 하러 가자~”
목소리가 컸는지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우리를 힐끗 바라본다. 빨리 이 가게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와중에 여리씨가 예뻐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진짜 속물이 다 됐구나. 나.
행복한가요?
모텔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곳이 내가 해외에서 묵었던 호텔보다 더 크고 예쁘고 좋다는 것부터 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청장에 달린 저 샹들리에 (분명 플라스틱으로 만든 모조품이겠지만)와 여섯 명이 누워도 빈자리가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침대. 한쪽 화면을 가득 채워서 비추고 있는 프로젝터.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내가 긴장을 하건 말건 내 팔짱을 꼭 끼운 여리씨는 바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모텔로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카운터에 제일 높은 층에 있는 방을 요구했다. ‘그 방은 파티룸이라서 15만원입니다.’라는 말에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네~ 그 방으로 주세요.’라고 했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안 남았고 연말 분위기가 한껏 올라오고 있고 여리씨는 술에 많이 취해있었다고 해도 모든 것을 알아서 다 해주고 있는 이 여자는 신이 내게 내린 천사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여리씨는 바에서 가져온 와인과 안주 몇 가지들을 긴 테이블 위에 꺼내놓고는 내게 손짓을 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려나.
아침에 눈을 뜨면 내 췌장이나 간 같은 것이 모두 사라지고 없는 건 아닐까? 새우 잡는 배 선창에서 눈을 뜨는 건 아닐까? 내게 이런 행운이 일어날 리 없으니 지금이라도 도망을 치는 게 좋지 않을까?
짧은 시간 동안 소설 대여섯 편을 쓸 만큼 고민에 빠져 있는데 내 등에 따뜻한 기운이 확 올라오며 내 허리에 팔이 확 감겼다.
“장기 안 꺼내 갈 거야. 빨리 가서 앉아요.”
어느샌가 내 등 뒤로 온 여리씨는 나를 뒤에서 확 끌어안고 엉거주춤하는 나를 테이블 쪽으로 밀었다.
등에 느껴지는 딱딱하지만 물컹한 이 느낌은 분명 가슴이렷다. 또 심장이 벌컹벌컹 뛰기 시작한다.
“헤헤헤헤. 심장 뛰는 거 느껴진다.”
어쩌면 이렇게 따뜻할까. 내 허리를 안고 있는 이 팔도, 내 등에 닿아있는 가슴도, 그리고 내게 던지는 저 장난스러운 말투도 너무 따뜻하다. 이것은 내가 그동안 ‘일탈’이라고 이야기했던 행동을 할 때의 두근거림, 짜릿함과는 차원이 다른 두근거림이었다.
테이블로 끌려가서 앉는 동안 느껴졌던 향기, 그리고 내 몸에 남아있는 온기, 살이 맞 닿을 때의 그 부드러운 느낌들은 금새 사라지지 않았다. 빨간 와인이 가득 담겨있는 와인잔에 비친 여리씨의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손이 떨릴만큼 기분이 좋았다.
"오빠. 물리학 잘 해요?"
응? 오? 오빠??
"그.. 그냥 관심있게 보는 정도일까? 잘 몰라요."
"쳇. 힘들게 오빠라고 했는데 나한테 존댓말 하니까 내가 다 민망하네. 그냥 우리 말 놓고 이야기하면 안되나~"
나에게는 이것도 또 다른 일탈중에 하나이다. 오늘 하루만 이런 일탈이 몇개째야.
"그.. 그래. 편하게 이야기하자. 근데 물리학? 물리학은 왜?"
"우리가 사는 여기는 3차원! 거기에 시간을 더하면 4차원! 그건 알고 있나해서."
"인터스텔라도 그렇고, 컨택트도 그렇고, 요즘 영화에서 많이 나오긴 하는데...... 아니 잘 몰라 몰라."
여기에서 더 복잡한 이야기로 가 버리면 나 진짜 머리 터져버린다. 바보같이 보일지라도 아는 척 하다가 밑천 드러나면 그게 더 쪽팔리는거다.
외모가 완벽해보이는 여자가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니 더 혼란스럽다. 신은 뭐 하나를 뺀다고 했잖아. 도대체 신은 여리씨한테 뭘 뺀거야.
"내가 오빠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 궁금하지?"
내가 가지고 있는 껄끄러움. 그 껄끄러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려는건가. 술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여리는 갑자기 손을 뻗어서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3년전, 아니 3년전은 아니구나. 아니 3년전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도 이런 느낌이었는데."
"3년전? 우리 3년전에 만난 적 있었어?"
"아니. 만난 적 없어. 오빠한테는 설명해도 몰라. 오빠는 물리학 잘 모르잖아."
뭐지? 나 지금 무시당한건가?
"그냥 술이나 마시자~~ 건배~ 건배~~ 오빠도 건배~"
껄끄러운 가시가 오히려 커졌다.
눌러줄꺼지?
한 시간 만에 우리는 남아있는 술을 모두 비워버렸다. 그 시간 동안 기억에 남는 것은 오빠 라는 단어 뿐이었다. 오빠! 오빠라는 단어가 주는 그 따뜻함과 두근거림. 한국어 중에서 ‘오빠’라는 단어만큼 달콤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게 하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근데 오빠.”
술에 취해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 테이블에 엎드려서 날 올려다보며 여리가 말을 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내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스위치는 어디에 있어?”
“스위치? 가방에 있지. 항상 들고 다녀야 하잖아.”
“맞아. 항상 들고 다녀야지. 언제 쓰게 될지 모르잖아.”
“그런 이유도 있지만 그걸 들고 있으면 자신감이 생기거든. 진짜 감당 안 되는 일 생기면 그거 누르면 되니까.”
근데 내가 여리한테 스위치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 술에 취해 있는지도 꽤 됐고 이것저것 이야기도 많이 하긴 했지만 스위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진 않은 것 같은데.
“근데 오빠는 그 스위치가 뭔지는 알고 있는 거야?”
“설명서에 쓰여 있었잖아. 난 설명서를 다 읽어보는 꼼꼼한 남자니까. 스위치를 누르면 내가 그 스위치를 받았던 그때로 돌아가는 거잖아. 게임에 리셋버튼처럼.”
여리는 내 맞은편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 의자로 왔다. 둘 사이의 얼굴의 거리는 숨 쉬는 게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다.
"그러면 여기서 퀴즈! 정답을 맞추면 선물을 줄께요~"
선물? 선물이라면? 선물이 뭘까?
"여리는 어떻게 그 스위치를 알고 있었을까요?"
"정답! 내가 이야기해서."
"땡! 땡! 땡! 틀렸어. 틀렸어. 오빠가 이야기를 하긴 언제 해."
그런가? 내가 이야기를 안 했나? 내가 이야기를 안 해줬는데 여리는 이 스위치에 대해서 어떻게 알지? 난 이것을 받기 전에는 이런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여리는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아! 아!! 난 바보다. 정답은 딱 하나밖에 없다.
"정답! 이 스위치를 여리도 가지고 있었구나."
"우와~ 우리 오빠 똑똑하네~ 정답! 맞췄어요."
박수를 치며 축하해줬다.
“그러면 여리도 지금 가지고 있는거야?”
”아니~ 아니~ 그건 눌러서 사용하면 다른 사람한테 휘리리리릭~ 가버려. 전세계에 딱 하나뿐인 귀한거야.”
"근데 그 스위치를 내가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여리가 보내준거였어?"
이 스위치는 어느날 내게 택배로 왔다.
"아니~ 또 아니~ 누구한테 갈 지는 누구도 정할 수 없어. 법칙이 있지만 정하지는 못해. 예상만 할 수 있지."
법칙이 뭔지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까 4차원이니 뭐니 이야기했던게 떠올라서 참았다. 내가 알 수 있는 법칙일리가 없다.
"근데 오빠는 그동안 그걸 안 누른 거야?”
술 냄새와 함께 달콤한 향기가 느껴진다. 여리한테서 이렇게 달콤한 향기가 나고 있었나?
“누를 일이 없었으니까. 이거 가지고 있는 동안에 내가 좀 잘 됐잖아. 리셋버튼이라고 했으니까 그동안 잘 된 거 다 없어지는 건데 난 모든 걸 되돌릴만한 아쉬운 일이 없었거든.”
“쳇. 부럽네. 난 아쉬운게 정말 많은데.”
여리는 내게 몸을 돌려 바짝 밀착을 했다. 그렇게 가깝게 붙으면 가슴이 또 닿는다고.
여리는 양손으로 내 뺨을 꼭 잡고는 내게 키스를 했다. 가슴이 닿는게 문제가 아니었다.
키스. 그야말로 머리끝에 피가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영혼이 입을 통해서 빠져나가는 것은 아닐까 싶을 만큼 그 느낌이 강렬했다.
“들어가서 먼저 씻어. 아주 땀이 범벅이셔.”
그랬다. 그동안 여리때문에 하도 긴장을 해서 땀을 잔뜩 흘렸다. 땀 냄새가 몸에 베인 걸까? 빨리 들어가서 씻고 싶었다. 둘 사이의 첫 경험을 땀 냄새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샤워실로 들어가는 찰나의 순간 거울에 비친 여리를 슬쩍 훔쳐보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바닥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표정이 무척이나 딱딱해 보였다. 당장 울음을 터트려도 될 만큼 굳어있는 표정이었다.
나와 모텔에 들어온 걸 후회하는 걸까? 막상 씻으라고 말을 하고 나니 실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난 여리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설령 내가 씻는 동안 여리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건 그것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추억을 만들었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다.
샤워를 하는 동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샤워실 문을 열었을 때 아직 방에 있을까? 샤워를 끝내고 나갈 때 속옷만 입고 나가도 될까. 여기 물은 참 따뜻하네. 우리 집에서도 이렇게 따뜻한 물이 안정적으로 나오면 좋으련만. 지갑은 내 바지주머니에 있지. 옷을 욕실에서 벗었으니까 내 지갑은 안전해. 여리가 방에 없더라도 난 실망하지 않을꺼야. 씻으러 들어오기 전에 전화번호라도 받아둘 걸 그랬나?
정말 많은 잡생각으로 내가 몸을 씻고 있긴 한 것인지 정신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다시 챙겨입고 욕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또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 문을 열고 나가면 내게 펼쳐질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과연 난 그 이후 상황을 견뎌낼 수 있을까.
침착하게 욕실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순간 차가운 공기가 내 온몸을 감싼다.
이 방이 이렇게 추웠나? 난 옷을 다 입고 있는데 왜 이렇게 공기가 차갑게 느껴지는 거지?
그건 창문이 활짝 열려있어서였다. 파티룸이어서일까? 창문이 꽤 컸다.
그 큰 창문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창틀에 아슬아슬하게 여리가 걸터앉아 있었다.
“여리야. 거기 그렇게 앉아 있으면 위험해. 그런 장난 치지 마.”
여리는 아무 말 없이 바깥쪽으로 발을 내놓고 창틀을 붙잡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에 여리의 위험한 모습이 겹치니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오빠…”
“응. 여리야. 위험하니까 빨리 내려와.”
“오빠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활짝 열린 창문이 덜컹덜컹 움직였다.
"내가 여기서 뛰어내리면 스위치를 누를 마음이 들까? 오빠한테 아쉬움이라는 게 생겨야 하는데.”
장난스러운 목소리는 사라져있었다. 원래 저렇게 차분한 목소리였나?
여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울고 있다는 것은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오빠는 왜 아쉬움이라는게 없는거야? 왜 그렇게 행복한거야?"
"여리야. 내가 행복하긴 뭘 행복해. 네가 거기 있으면 전혀 행복하지 않아."
“짧은 시간이었지만 재미있었는데. 스위치를 가진 사람이 오빠가 아니길 바랐는데 내가 바라는 건 하나도 안 이루어지네.”
순간 여리를 처음 만났을 때 갸웃거리던 모습이 떠 오른다.
“무슨 소리야. 여리야. 장난치지 말고 빨리 내려와.”
여리는 창틀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아직 풀고 있지 않았다. 아직은 희망이 있어 보였다. 여리를 뛰어내리지 않게 할 희망이 있어 보였다.
“근데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좋더라고. 그래서 다행이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제발 부탁이니까 거기서 내려와. 너 정말 떨어질 것 같아.”
“근데 말이야. 오빠는 아직 나 좋아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내가 어떻게 대답을 해야 저기서 내려올까? 짧은 시간동안 머리를 써 보려고 했지만 머리를 써서 대답하는 것 보다 지금은 내 마음에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해야 할 때이다.
“응. 난 네가 너무 좋아. 그러니까 제발 내려와. 제발 내려와 줘.”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쉬이이익 소리를 낼 만큼 강렬했다.
“미안해...
오빠. 미안해. 내가 해결해야 했는데. 오빠한테 정말 미안해. 미안.”
“여리야. 내려와. 미안해하지 말고 내려와. 내려오면 내가...”
그 이후에 모든 것은 느린 동작처럼 보였다.
여리는 창틀을 잡은 손에 힘을 뺐고 몸은 천천히 창문 밖으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여리는 허리, 등, 머리,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이 순서대로 보이고는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머릿속에 ‘띠이이이이이’하는 주파수가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 거지? 지금 내가 꿈을 꾼 건가?
여리. 나에게 환하게 웃던 여리.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검지를 흔들던 여리. 고개를 젖히고 환하게 웃던 여리. 내게 달콤한 향기를 전해주었던 여리. 잊을 수 없는 짜릿한 키스를 알려주었던 여리. 그 여리가 사라졌다.
창밖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여긴 9층이었고 창밖으로 비명이 들리고 있고 여리는 저 창밖으로.
가방. 가방. 가방을 찾았다. 가방. 가방을 어디에다가 뒀지.
테이블 아래 있던 가방을 뒤집어서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바닥에 쏟았다. 그 물건들 사이로 빨간색의 정사각형 상자가 떨어졌다.
그래. 이거다. 스위치. 이거면 된다. 이걸 누르면 모든 것은 리셋이 되고 여리는 다시 말을 할 수 있고, 걸어 다닐 수 있고, 웃을 수 있다.
‘딸깍’
스위치는 내가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부드럽게 눌렸다.
이렇게 허탈한 느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게 쉽게 눌리는 버튼을 그동안 난 누를까 말까 그토록 고민했고 그토록 의지했고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딸깍’ 소리가 났을 때 몇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다시 여리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 이런 기억들도 모두 리셋이 되어버리는걸까? 그럼 난 다시 여리를 만나지 못하게 되는걸까?
아니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
우연히라도 스쳐지나가게 되면 내 심장은 또 두근거릴테니까.
택배
아무리 날씨가 덥다지만 사무실은 너무 춥다. 냉방병이니, 전기를 아껴야 한다느니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없다. 무릎담요 두 개를 뚫고 내 다리까지 파고드는 이 냉기는 내 다리에 닭살이 돋아야 만족을 한다.
“여리씨. 추워요?”
“겨울에도 이것보다는 덜 춥겠다. 내일 회사에 패딩 가져올 거예요.”
“패딩쯤은 입어줘야지. 여기 또 택배 왔어요.”
“응? 택배요?”
요즘 돈을 좀 많이 써서 지마켓에 들어간 지가 한 달이 넘었구먼 웬 택배?
“응. 오랜만에 왔네요. 뭐 샀어요?”
“몰라용~”
“응? 몰라요?”
그럴리가. 이 독특한 빨강색 태이프. 발신자가 써 았지 않은 이 택배를 모를리가 없다.
“농담이예요. 내꺼인데 모를리가요. 너무 오래 기다렸던 것이라서 완전 잊고 있던 것이긴 해요. ”
“알리에서 주문했나보구나. 거긴 잊을만 하면 택배가 도착한다는 즐거움이 있긴 하죠.”
“거기 그렇게 서 있어도 이거 뭔지 안 알려줄테니까 저리 가요. 워이~ 워이~”
”네~ 네~ 예의 없는 회사동료가 될 생각은 없으니까. 즐오픈!!”
발신자도 쓰여 있지 않은 택배.
택배를 뜯었다.
그 안에는 동그란 스위치가 달린 정사각형의 작은 상자가 들어있었다.